통찰과 융합의 중간, 통섭
최재천을 처음 알았던 건 중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우리 학교의 국어 시간은 좀 특이해서, 매주 새로운 책을 읽고 토론하곤 했다. 그 주차에는 자연과학과 연관된 주제를 다루었는데, 중간에 최재천의 "통찰"이라는 책 이야기가 나왔다.(책에 통섭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과학에 관심이 있던 나는 통찰과 융합의 차이, 그리고 통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인문학에 관심이 튼 건 그때부터였다. 내 관심사였던 과학과 전혀 관계가 없을 줄 알았던 국어, 영어, 사회가 통섭이라는 개념 하나로 과학과 엮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통찰"이라는 책을 읽은 건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매일 4시간씩 독서실에서 공부했는데, 유독 시험이 끝나면 이때 할 게 없었다. 도서관에서 통찰이란 책을 우연히 보았다. 그 당시 나는 책 읽기를 싫어했지만, 무언가에 이끌려 대출을 신청했고, 한두 페이지만 딱 보자 했던 책은 어느새 책장이 술술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는 과학을 싫어했다.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고, 수학은 어려웠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게 과학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읽었던 통찰은, 과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려줬고 비로소 객관식의 과학이 아닌 창의성의 과학을 해야 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공부하는 이유
경험을 쌓는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지금 공부를 한다. 수많은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며 영상을 만들던 그 시절을 지나니 이제는 공부하고 싶나보다. 많은 사람이 공부함에 있어 대학, 성적, 취업 등 현실적인 이유를 생각하곤 한다. 왜 공부하는지보다 무엇을 공부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만약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만 하며 보냈다면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험을 하다 보니 새로운 경험에 있어 공부가 필수 불가결한 존재임을 알게 됐다. 달리기할 때 숨을 쉬듯이 경험을 향해 달리려면 숨 쉬듯 공부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하는지는 아는 게 없었다. 단순히 책을 하나 사서 진도를 나가고 문제를 푸는 단순한 방식의 공부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공부는 인생이라는 큰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어디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지혜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을 탐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식의 공부라면 어떤 책을 고를지도 많은 고민이 필요해진다. 예를 들어, 개발자로서는 단순히 웹을 공부할지, 앱을 공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선호도와 편의성에서 창발하는 IT산업의 전반적인 이해를 통해 앞으로 어떤 기술이 필요하게 될지 예측하는 것이 우선이다. 백엔드, 프론트엔드, 인공지능 등을 결정하는 건 나중 일인 것이다.
서점에서 "최재천의 공부"란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지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이 책은 치트 키가 될 것 같았다. 최재천은 우리나라에서 통섭이란 개념을 처음 들여온 학자였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consilience"를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을 빌려 통섭이라 번역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최재천의 공부" 책에서는 최재천 교수의 공부 인생 이야기를 다뤘다. 서울대학교 동물학과를 나와 하버드에 가기까지, 학점도 그리 높지 않았고 진로에 대해 방황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하버드를 나와 통섭이란 개념을 만들고 석좌교수가 되기까지 통섭이 그의 삶에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물학과 인문학을 겸비하며 얻은 삶의 지혜가 그의 지금을 만들었다.
최재천이 생각하는 공부란 무엇일까
공부란 생각하는 것
얼마 전까지도 내가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던 나날들이 있었다. 객관식은 쥐약이었다. 3번과 4번이 비슷한데 무엇이 맞는 건지 도통 찾기가 어려웠다. 반면 생각하는 건 잘했다. 2020년이었다. 캔위성 경연대회를 준비하라는데 뚱캔만한 위성을 활용해 어떤 걸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구글 어스를 키고 발사 장소의 지도를 두 시간 내내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랬더니 지면까지 도달하는 2차 우주선(cosmic ray)을 관측하는 데 있어 최적의 장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재천이 말하는 공부란, 사실상 이런 것이었다. 하루 종일 개미를 관찰하고, 내일 또 관찰한다. 그러다 보면 개미는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가 보인다. 계통분류학적으로 어떤 개미들이 있는지도, 어떻게 길을 찾는지도 보인다. 계속되는 관찰은 생각하는 과정이 되고, 어느 순간 답을 찾고 그간의 관찰 결과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당장 밖에 나가 개미를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할 것이다. 경험상 이러한 관찰의 과정은 더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만약 그 해 초에 특수상대성 이론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뮤온(우주선의 일종)의 지표 도달에 대한 생각도, 이걸 캔위성으로 관찰하겠다는 콘셉트조차 구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2~3년에 한 번씩 나오고, 그때마다 몇 배는 더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최재천 교수도 처음엔 개미를 관찰하는 데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통섭에 이르기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다양한 지식을 통달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궁금했던 것은 이러한 지식을 통달하고 통섭하게 하는 성실성의 원동력이었다.
성실성의 이해
책에서 최 교수는 독서는 빡세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엔 이 키워드를 목차에서 보았을 때 회의적인 식견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이유를 찾을 때까지 독서를 미뤄도 되는 거 아닌가? 다시 말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는 데에도 독서를 지속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최 교수는 새로운 개념은 안 읽히기 마련이고, 이런 책을 있는 힘을 다해 읽다 보면 비슷한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계속하여 지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선 빡세게 독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지식의 지평을 넓혀야 하는 이유는 더 많은 경험을 위함이다. 생각해 보면 대학교 때는 고등학교에 비해 이렇다 할 경험을 하진 못했다. 고등학교에선 어려운 개념을 계속 배우고 이해하려고 했던 반면, 대학교에선 아는 걸 위주로 부딪혀 봤기 때문이었다. 빡세게 독서하며 새로운 지식을 향유해야 더욱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죽어가는 창의성, 외면받는 제너럴리스트
빡센 독서와 이에 기반한 많은 경험을 얻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험의 끝은 어디일까? 실제로 수많은 기업은 제너럴리스트보단 스페셜리스트를 원한다. 인문학과 같은 여러 학문을 얕게 넓게 아는 사람(제너럴리스트)보다는 전자공학, 컴퓨터 공학처럼 한 우물을 깊게 판 사람들(스페셜리스트)을 취업하고자 한다. 사회도 그렇게 돌아간다. 창의적인 작품은 소수의 아티스트가 만들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어, 요즘 음악 시장에는 양산형 발라드가 주를 이룬다. 이 유형의 음악들에선 창의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음악들이 아티스트의 작품보단 슬픔과 이별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새롭고 창의적인 음악은 차트에 올라가기 어렵기 마련이다. 이처럼 제너럴리스트는 남들과 다르게 보고 창의적으로 무언갈 만드는 재주가 있을지 몰라도, 이를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제너럴리스트로서 이런 고민을 많이 하며 살았다. 나중에는 실력이 부족해서 취업이 되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이에 대한 답을 “제너럴리스트” 최재천 교수를 통해 얻고 싶었다.
최재천 교수는 이러한 공부와 경험의 목적이 삶의 지혜를 얻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모 세대의 조언을 쉽사리 따르려고 한다. 좋은 대학과 대기업 입사를 성공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책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40년 차이가 난다고 한다. 부모 세대의 기준에서 대학과 대기업이 제일 중요했지만, 자식 세대는 새로운 상황과 문제가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더 이상 대기업에서 승진과 내 집 마련을 바랄 수 있는 세대가 아니며, 집값 또한 일본의 발자취를 따라갈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것보다 내 판단과 주관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더욱 현명할 것이다.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것이 당장의 취업과 학점에는 불리할 수 있지만, 미래를 보고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와 비주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얼마 전엔 GPT-4 언어모델을 기반으로 한 ChatGPT가 나왔다. 더 놀라운 것은 GPT-4를 시작으로 모빌리티, 디자인, 미디어, 게임 등에 점점 인공지능이 녹아들 것이다. 반면 검색과 SNS의 해는 지고 있다.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울의 사람들은 날이 좋아 한강 공원에 나오는 것을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는 것보다 좋아할 수도 있지만, 캐나다 캘거리 지역 사람들은 추운 날 집 안에서 인스타그램을 즐길 수도 있다. 주류였던 구글, 페이스북, 네이버가 지고 새로운 해 OpenAI가 떠오른다. 책에서는 지금 주류를 보고 있으면 얼마 후 주류에서 밀려날 것을 보는 것이고, 비주류를 뒤지다 보면 주류로 진입하는 경향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공부하든 경험이 되어 돌아온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지금 토목공학으로 전과한다면? 변리사 시험을 공부한다면? 내 진로와 전혀 방향이 맞지 않는 주제지만, 어떻게든 경험으로 돌아올 것이기에 변화를 망설이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
책의 모든 부분에서 인용하여 쓸 얘기가 너무나도 많았지만, 굵직한 주제를 어느 정도 다뤘다고 생각하여 이즈음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빡세게 통섭하는 것, 이 정도로 최재천의 공부를 요약할 수 있겠다. 무엇이든 공부하고, 경험하고, 부딪히는 것이 인생에 성공하는 방향이라는 건 너무나도 잘 알 것 같다. 최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공부는 왜 하는 것인가? 결국 삶을 잘 살기 위함이라고 한다. 공부할수록, 대내외적으로 성공하는 역량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고, 존중하는지에 대한 것도 같이 가져갈 수 있겠다. 본인의 자리에서 상대를 바라보면 각자가 뿜어내는 가치가 보이고, 이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사회가 추구해야 할 다양성의 가치라고 한다. 저마다의 삶 속에 저마다의 공부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가 익을수록 우리는 관계를 보살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겠다. 최재천의 공부를 읽었다.
2023.05.13, 류관형